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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군

국가상징

전설

취석정

조선 중종시대, 당파싸움이 극심하던 때였다. 많은 선비들이 당파싸움을 피하여 물 맑고 산좋은 산수를 찾아 남은 여생을 숨어서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역시 당파싸움에 회의를 느껴 중앙 정계에서 낙향한 두 젊은 선비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광주 노씨 묵재선생과 밀성 박씨 완천선생이었다. 두 선비는 영남의 좋은 고장에 가서 후진양성에 힘쓰며, 시와 글을 짓고, 활도 쏘며 남은 일생을 좀 더 보람있게 보내기로 마음먹고 서당자리를 찾았다. 이들은 영남지방의 모든 곳을 다 다녔으나 적당한 곳이 없어 고심하다가, 지금의 구만면 주평리 주평(주천) 샘물가에서 물을 한잔 마시고 곤히 잠이 들었다. 따뜻한 봄날, 잠든 그들의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자네, 두 선비들. 그대들의 마음이 충성스러운 줄 안다만 자네들이 찾는 명당자리란 특별한 장소가 없네. 자네 들이 누워있는 그곳이 명당자리라네." 하고 사라져버린 것이다. 잠에서 깨어 온 사방을 살펴보아도 선비 생각에는 좋은 곳이 못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샘물 옆에 집채 만한 바위가 있는 것이 정자 한 채는 충분히 지을 수 있는 곳이라. "옳거니, 여기가 바로 명당자리구나." 하고 바위 위에 올라서 보니, 하늘을 찌르는 바위산이 있어 여기에서 인재를 양성하면 특출한 인물이 나올 것 같았고, 앞으로 보이는 구만 들판은 많은 인재가 나와 이 고을을 전국에 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이곳에 정자를 지으니 산수가 좋아 많은 후배 인재들의 마음을 참되게 가르칠 수 있었으며, 그들 또한 여가를 이용하여 활을 쏘니 날아가는 새가 백발백중 떨어져 죽어, 취석정 활터는 영남지방에서 유명하였으며, 영남의 많은 궁수 들이 이곳을 찾아 궁술대회를 열곤 하였다. 활시위를 당긴 후 목이 말라 샘물을 마시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술을 먹고 취한 듯한 느낌으로 은근히 기분이 좋아 시를 지으니, 시 또한 장원급제자의 시문보다 우수한 글이 나왔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항상 시를 지을 때는 이곳 샘물을 한 모금 마셔야 좋은 글이 나올 수 있다 하여 주천(술샘)이라 하였고, 은근히 취한 그들은 취석정에 올라가 활을 당기니 궁술 솜씨 또한 훌륭하였다. 이 마을의 출신으로 이조판서가 되어 이름을 떨친 박덕순은 취석정이 배출한 인재이다 . 취석정 옹달샘은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질 정도의 극심한 한발이나 천재지변에도 일년 사철 샘물이 줄어들거나 불어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추운 겨울에도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냉수가 솟아난다. 취석정 옆에는 장골들의 다섯아름이 나 되는 큰 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왜정시대 때 베어 버렸다고 한다. 또 이 옹달샘에는 귀가 돋힌 큰 메기가 있는데 이 메기가 보이면 이변이 일어난 다고 하며, 8.15 해방과 6.25때에 나타났다고 한다. 언젠가 주민들이 양수기를 동 원하여 물을 퍼 샘을 치울 때, 귀가 돋힌 뱀장어 몇 마리를 보았다고 한다.

철관동녀

때는 조선시대, 최운철이 구만면 소대촌에 터를 닦아 집을 지으려고 하니, 한 늙은 중이 시주를 다니다 이곳을 두루 살피며 혼자서 중얼거리며 지나가거늘 주인이 중을 붙잡고 아는 바가 있다면 자세히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스님은 처음에는 모른다고 했으나 계속 간곡한 부탁을 드리자 말하기를 "이 집터는 명당이니 집을 짓되 상량시간을 잘 택해서 좋은 시에 해야만 이집에 살면서 아들 둘을 두어 그 이름이 일국에 떨치게 되리라" 하였다. 좋은 상량 시가 어느 때냐고 다시 물으니, "내일 이곳에서 기다리면 쇠갓을 쓴 계집애가 남쪽에서 오고 있을 것이니 그때를 잃지 말고 상량하라" 하고선 스님 은 갈 길이 멀다면서 훌쩍 떠나버렸다. 쇠갓을 쓴 계집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었는데, 다음날 그곳에 나가 기다리 니 솥뚜껑을 이고 남쪽에서 오는 소녀가 보였다. 그 시간에 맞춰 상량을 하였더 니 차츰 가산이 늘고 두 아들을 얻게 되었는데, 이들이 임진란 때에 창의하여 큰 공 을 세운 의민공 최균, 의숙공 최강 형제이다.

효대마을

조선조 인조 1년(서기 1621년) 의숙공 최강(崔堈)께서는 향리의 자라나는 소년 들에게 "天"을 시작해서 효도하는 마음, 어른을 공경하는 마음 등 충효사상 및 인의예지신을 가르치고자 서당을 열고 있었다. 그 제자중에는 "곽동"이라는 유별난 아이가 있었는데, 스승의 가르침도 외면하고 항시 나쁜 짓만 하고 다녀, 동네 주민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개구쟁이었다. 부모의 말도 듣지 않고 계속 청개구리 짓만 하고 다니자, 부모는 그 스승에게 자식놈을 제발 사람 좀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러던 여름날, 폭풍우가 몰아치고 비바람이 거세게 부는 날 "곽동"이 집에 들어가려고 대문간을 들어설 때였다. 난데없이 20자나 되는 늙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입을 쫙 벌리고 앉아서 "네 이놈! 오늘 또 무슨 나쁜 짓을 했느냐? 너는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으니 나의 먹이가 되어야겠다"라고 으르렁거리자, 소년은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서 머리를 땅에 붙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러나 호랑이는 "이놈! 필요 없다. 너를 꼭 잡아 먹어야겠다" 고 하자, 소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번 한번만 살려 달라고 빌었다. 호랑이는 "이번만 살려줄 터이니, 스승의 말씀을 잘 들어라"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그 후 이 소년은 스승의 말씀이라면 팥이 콩이라 해도 순종하였고,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선비가 되었다. 이로부터 마을의 모든 소년들이 한결같이 효행을 실천하여 임금으로부터 효자상을 받는 등 효자.효녀가 많은 동네로 이름을 떨쳐서 마을이름도 효대(孝大)라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마을의 여러 곳에 효자비, 열녀비 등이 남아 있다 .

담당부서구만면 총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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