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자 통계

본문 바로가기

고성군

국가상징

전설

두포리

장지마을

  • 쇠스랑 장군
    임진왜란때 지금의 미룡리 대밭골에서 농민이 퇴비를 장만하고 있었는데 마침 왜적이 쳐들어와 주민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가재를 불사르는 등 온갖 횡포를 저지르고 있을 때 이덕상이라는 숨은 장사가 퇴비를 장만하던 쇠스랑으로 왜적을 쳐 죽였는데 그 수효가 석둘음 한갓(한둘음은 20명, 한갓은 10명)이나 되었다 하며 그 후 왜적에게 쫓겨 이곳 장지마을에서 은신하여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여 이곳의 지명을 장군의 이름을 따서 “덕상개”라 하였으며 숨은 장군이라하여 “숨은장군 이덕상공”이라 하였고 쇠스랑으로 왜적을 물리쳤다 하여 “쇠스랑 장군”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공의 공덕비가 영선재에 있다

포교마을

  • 옛날 포교마을에 어느 지관이 지나면서 선녀가 베를 짜는 현상으로 이곳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하고 가문이 융성해지는 명당이라하여 경주이씨가 조상의 묘를 썼는데 그 후 일제때 용호마을(에랑개)에 거주하는 “김하여”라는 자가 경주이씨 묘위에 관권을 이용하여 반대를 무릅쓰고 묘를 이장하자 한달만에 “김하여”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을 하다가 죽었으며 그 후 “김하여”는 밤중에 몰래 조상의 묘를 이장해 가고 통영지방으로 이사해갔다는 명당에 대한 전설이 있다

덕산마을

  • 눅개마을(눅개, 모래치,박골, 맷땀을 합하여 덕산마을로 1962.7.1일자로 분동) 먼 옛날 육지의 심한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어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마을주민이 바닷가로 가면 고기라도 잡아먹을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이곳을 찾아오던 중 새벽에 고개를 넘어오니 눈앞에 바다가 보이고 고개 바로 밑에 엄청나게 큰 개가 누워있는 것을 보고는 무서워서 꼼짝도 못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차음 날이 밝아 자세히 살펴보니 산의 형상이 마치 커다란 개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인 것이었다. 그래서 의논을 하였는데 몇 사람은 저렇게 큰개가 누워있는 곳에 무서워서 살 수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보자 하였다. 이렇게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일행 중 제일 나이가 많은 노인 한 분이 개는 인간의 집을 지켜주는 이로운 짐승이므로 우리가 이곳에서 살게 되면 저 개의 형상을 한 산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니 이곳에 정착하자고 설득을 하여 살게 되었다고 하여 “누운 개”라 하였는데 어음이 차츰 변하여 “눅개”라고 지금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삼봉리

상촌마을

  • 의적 갈봉
    상촌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의적 갈봉에 대한 전설은 여러 갈래로 전해지고 있다. 어머니가 갈봉을 잉태하여 산기가 있던 날, 도사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남쪽 먼 하늘에 높이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며 저 구름이 사라지기 전에 출산을 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구름이 사라져도 갈봉은 태어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끼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때 갈봉이 태어났는데 도승이 “아까운 장군”하면서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는가 하면 “역적 낳았습니다”하고 사라졌다는 설도 있다. 갈봉은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남달리 총명하나 워낙 집안이 가난하여 갈봉의 어머니가 엿장수로 생활하는 처지로 서당에도 보내지 못하였다. 그러나 갈봉은 자라면서 마음이 정직하고 어질었으나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성미였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탐관오리로 치부한 집이나 욕심많은 부자집의 재물을 털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 주어 가난한 백성은 좋아했으나 조정에서는 도적으로 몰아 체포령이 내려져 포졸에 잡혀 모진 고문과 곤장을 맞아 감영에서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갈봉이 죽은 며칠 후 영혼이 나타나 영장(靈長)을 죽여 버리겠다고 하면서 걸어가더라는 것이다. 그 후 영장(靈長)이 신음하다 죽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갈봉에 대한 전설은 후손도 찾을 길이 없어 말로만 그 흔적이 전해지고 있다.

장치리

중촌마을

  • 국시골 말바위
    국시골 말바위는 예부터 동신제를 지내던 바위로 바위 가운데 쇠말뚝이 있었는데 그 쇠말뚝머리가 동쪽으로 가 있으면 동쪽마을에서 가축이 질병으로 앓는다든지 호랑이가 가축을 물어 간다든지 하여 화를 입고 또 서쪽으로 가 있으면 서쪽 마을에서 이러한 재난을 당하였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하여 산신제를 매년 음력 정월 14일날밤 자정에 지내고 왔다. 그런데 일제때 일본사람이 이곳에 처음 쳐들어와 쇠말뚝을 도둑질하여 가고 난 후인 1978년부터는 동제를 지내지 않고 있으며 바위 둘레가 약 40m,눈이가 약 5m정도 되는 타원형의 큰 바위가 국시골에 있다

참나무지

  • 참나무지는 큰 참나무(둘레가 약3m, 높이가 40m 정도)가 서 있었던 곳으로 동제를 지내든 날에 “목신제”를 같이 지낸 나무로 지금은 고사되어 없어졌는데 그나무가 서 있던 곳을 참나무 지라 부르고 있다.

장치리 팽나무(포구나무)

  • 삼봉저수지 밑의 들 복판에 분재모양을 한 큰팽나무로 수령 약 300년 된 나무로서 높이 약 20m, 둘레가 5m 정도인 당산목이다. 매년 정월 14일 저녁에 동민들이 모여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다고 하나, 1975년 이후부터 지내지 않고 있다. 이 팽나무의 나뭇잎이 무성하게 자라면 풍년이 들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보호수. 마을나무).

판곡리

망사재

  • 망사재는 운정 박애상(고성인, 임진란 창의공신)공을 향사하는 재실로서 고성읍에서 판곡리로 들어오는 입구(송낙골)에 있다. 1599년(선조 32년) 3월에 왜적이 남해노량 해전에서 패하여 도망쳐온 일부가 고성만의 유자섬 앞바다에 숨어 들어와 육지에서 온갖 못된 노략질을 하 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운정 박애상 공은 의병을 이끌고 현령 조의도와 함께 출전하여 왜적을 무수히 참획하고 해상에서 순절 하였고 그 후 남편의 순절한 소식을 들은 부인 어씨(漁氏)도 남편 뒤를 따라 그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하여 후에 공은 고성현의 남쪽 천마봉에 초혼장을 하였으며 부인 어씨는 시체를 건져 그 아래에 같이 모셨으니 자손은 멀리서 바라본다고 망(望)자를, 동리 마을 사람들은 공을 거듭 사모하여 생각하게 된다고 사(思)자를 붙여서 그 산을 망사정이라 하였고 재실을 지어 “망사재”라 이름하여 오늘날까지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고 있다.

마리개와 갈망개(갈마포 : 渴馬浦)

  • 옛날에 대인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다가 말이 목이 말라 가지를 못하고 섰다고 하여 “마리개(馬里浦)”라 지금도 부르고 있으며, 목을 넘어온 마을 입구에 조그만한 샘이 있었는데 그 샘에서 대인과 말이 같이 목마름을 면하였다하여 갈망개(갈마개:渴馬浦)라 부르고 있다.

담당부서삼산면 총무담당  

배너모음